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닙니다. 도둑놈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허경영
때는 6.25 전쟁 시기,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게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쟁이 우리의 자유 독립을 위한 최후 결전 단계임을 선언하고 국민총력전으로 이를 극복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현재의 향토예비군과 같은 개념으로
제 2 국민병 부대인 "국민방위군" 을 창설한다.
1950년 12월 21일 공포 실시된 ‘국민방위군 설치법’에 의해 지원 대상자는 17~40세 남성이었는데,
순식간에 50만명의 장정들이 이 부대에 지원하게 된다.
그들 중에는
“나는 화랑도 정신을 갖고 있다. 전쟁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신명을 바칠 것이다”
라는 애국 혈서를 쓰고 지원한 사람들도 있었다.
<소집 중인 국민방위군>
이렇게 모집된 국민방위군에 책정된 예산은 209억원이었는데, 이는 50만의 병력에 비하면 피복 장비는 커녕 식량조차도 조달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이렇게 열악한 와중에도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자기 잇속을 챙기는데 급급했다.
애국심으로 지원한 이 수많은 청년들은 간부들의 착복으로 인해
식량부족, 강추위, 보급품 부족, 빈약한 수용시설, 위생시설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어나갔다. 그 수는 자그마치 약 9만명~12만명으로 추산된다.
원인은 간부들의 공금횡령, 물자부정처분, 부실한 운영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이종국등 14인에 의해 국회에 알려지게 되고, 조사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당시 국민방위군 사령관이었던 김윤근은 이를 '불순분자들에 의한 유언비어다. 유감스럽다' 라며 오히려 뻔뻔하게 나왔다.
<여운형(좌)와 김윤근(우)>
또한 이에 동조해 당시 국방장관이던 신성모는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이에 분노한 국회는 국방장관 해임 건의안을 제출했으나 부결되고, 사건은 점점 끌어지고, 사망자는 늘어만 갔다.
당시 사건을 조사한 국회조사위원회에 의하면 총 횡령 액수는 50만명에게 배정된 예산의 1/10 인 24억, 쌀 1887가마.(핵노답...)
주범인 김윤근과 일당들은 정치권에 강력한 로비를 시전, 이승만 정부는 보여주기 식으로 가볍게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해 김윤근 기소각하, 그외 관련인들은 고작 징역 1년6개월~3년6개월 선고를 내린다.
이 재판의 결과로 국민들은 분노에 들끓었고, 이를 감당하지 못한 이승만 정부는 재조사를 지시한다.
이 재조사를 지휘한 사람이 새로 국방장관에 임명된 그 유명한 이기붕ㅋㅋㅋ(이를 계기로 국민적 인기를 얻게됨 ㅎ.ㅎ)
재조사 중 국방장관 신성모가 사임하고, 부통령 이시영 은 철저한 조사를 부탁하며 사표를 낸다.
재조사를 통해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은 해체되고,
1951년 7월 19일, 군법재판이 열려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현
재무담당 강석환
조달과장 박창언
보급과장 박기환
6줄요약
1) 6.25때 전국민이 싸우자고 말하며 국민방위군(예비군개념) 창설-50만명 지원
2) 예산 1/10 수준의 생계형비리 시전
3) 9만명 얼어죽거나 굶어죽음
4) 사건 은폐하려다 국민적 분노를 삼
5) 사형
6) 60년이 지나도 그대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리가 문제...... 비리 근절만해도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