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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정(金武亭)


자는 명석(明石). 본명은 김병희(金炳禧)이고 별명이 김무정(金武亭). 함경북도 경성 출생.


14세 때 3·1운동에 참여하였다. 


1923년 3월 중국으로 건너가 1924년 중국 바오딩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 강무당 포병과]에 입교, 같은 해 졸업하고 임관하였다. 


1930년 6월 후베이성 양신(陽新)에 있던 펑더화이의 군대에 합류, 일본군과 교전 중 20여발의 포탄을 쏘아 10여발을 일본군 전차와 적함에 명중시켜 적함은 물러나고 말았다. 이때의 포격으로 김무정은 홍군의 전설적인 포사격 영웅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국공분열 후에는 루이진[瑞金]의 중국 노농홍군에 입대, 1934년 10월부터 전개된 2만 5000리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1938년 1월에는 제팔로군 최초로 창건된 포병단(병력 1,000여 명)의 단장이 되었다. 제팔로군이 화북 일본군에 대공세를 퍼부었던 1940년 봄 백단대전(百團大戰)에 포병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김무정은 뛰어난 포병술로 유명했는데, 달리는 자동차를 박격포로 정확히 맞출 정도여서 소련군 장군들도 놀라 감탄했다고 함.)


그 뒤 주로 조선인 민족간부 양성에 주력하여 화북조선청년연합회(1941년 1월 太行山 속에서 결성) 조직을 주도, 회장에 취임했으며, 1942년 7월에 조직된 조선의용군 총사령이 되었다. 그 해 말 타이항산에서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를 창설, 조선 청년들을 교육하였다. 


1944년 12월에는 조선 본토에 남아있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과 비밀리에 연락을 하여 동맹을 맺었다.


이때 국내 진공작전도 계획되었으나, 불행히도 일제가 너무 빨리 패망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음.


다만 김무정은 공산주의 계열에 속한 데다가, 해방 이후 북한 정권에 가담했기 때문에

독립운동사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남한)에서는 철저하게 잊혀진 인물이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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