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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7 07:05

여동생이야기

조회 수 292 추천 0 댓글 8

내겐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다.
중학교 때 나와 녀석과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그냥 보이면 싸웠다.
게다가 녀석은 지능적이었다.
싸울 때는 야만전사처럼 싸우던 년이 부모님 앞에서는 "오빠아가 나를 막 때련눈데에" 훌쩍이면서 지껄였다.
레아같은 년.
비쥬얼로만 치자면 여동생은 쬐끄만하고 호리호리했기 때문에 정말 피해자처럼 보였다.
그날 난 이중인격이 뭔지 깨달았고 깨달음의 대가로 아버지께 야구빠따로 뒤지게 맞았다.
나와 배틀로얄을 벌일 때 동생이 들고 있던 야구빠따였다.

그래도 난 동생과 힘으로 맞서 싸우면 내가 이기는 줄 알고 있었다.

말린 북어 줘패듯 아버지께 후드려맞은 이후로도 우리는 맨날 싸웠다.
이년은 전생에 나랑 무슨 원수를 졌길래 남매로 태어났나 싶었다.
얼굴만 보면 전투본능이 일어났다.
주변에 있는 물건들 중 그립감 좋고 후드려 패기 좋아보이면 아무거나 들고 일기토를 벌였다.

내가 정도 이상으로 깐죽거린 날이었다.
이전까지 싸움의 규모가 수류탄을 터트린 정도라면 그날은 네이팜탄이 터졌다.
최고의 개판이었다.
영화로 치자면 '디워'였고 소설로 치자면 '투명드래곤'이었다.
싸우다가 분을 참지 못했는지 짱 쎈 여동생이 크롸라라 울부짖엇따...
녀석은 그러고는 자기 방으로 쿵쾅쿵쾅 걸어갔다.
씩씩거리며 문짝을 찼다.
문짝이 뜯어져 날아갔다.
소름이 끼쳤다.
난 그때서야 지금까지 나와 싸우다가 동생이 한 발 물러나는 게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경탄할 만한 자제력에서 기인한 결과라는 걸 깨달았다.
녀석과 계속해서 적자생존의 경쟁을 벌인다면 언젠가는 문짝이 아니라 내 몸이 뜯어져 나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난 그 날 이후로 동생에게 개기지 않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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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이니시에이팅을 걸지 않자 여동생도 잠잠해졌다.
하루하루가 둠스데이 같았던 여동생과의 전쟁은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막상 탈 없이 지내자니 다시마 빠진 너구리처럼 일상이 미묘하게 심심했다.
하지만 난 무사안녕 속에서 행복을 찾는 소시민이었다.
나는 시비가 걸릴만한 일을 미리 차단했다.
한화 이글스 팬의 마음가짐을 본받아 몇 번 있던 동생년의 도발도 무한한 인내심으로 응수했다.
결국 문짝브레이킹의 재현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기숙사형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드는 데,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이 미친 학교는 모의고사 등급을 카스트 계급처럼 신봉했다.
모든 건 학업증진의 이름 아래 정당화됐다.
휴대폰 사용 금지는 기본이고 한 달에 한 번을 제외하고는 외출도 되지 않았다.
집이 격하게 그리웠다.
부모님이 그리웠고 컴퓨터가 그리웠고 푹신한 침대도 그리웠다.
싸우다 든 미운 정 때문인지 여동생도 안방 화장실 깔판만큼은 그리웠다.

한 달이 지나 드디어 외출 주말이 됐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텅 빈 집에서 화장실 깔판 아니 여동생이 나를 반겼다.
SF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중학교 때였다면 이 잔망스러운 년이 또 무슨 꿍꿍이일까 의심부터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달만의 해방감에 뽕 맞은 것처럼 취해있던 나는 여동생을 마주 반겼다.

사건은 그 날 저녁에 일어났다.

내 방은 내가 기숙사에 들어가자마자 창고로 바뀌었다.
거실 소파에서 자야 하는 처지에 대해선 별로 불만이 없었지만,
거실 한켠으로 옮겨진 내 컴퓨터의 위치는 유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우리 집은 '컴퓨터 사용시간 = 부모님 자기 전' 이었다.
안방에서 바로 컴퓨터가 보이는 자리였기 때문에 몰래 컴퓨터를 하다간
어느 순간 아버지께서 골프채를 들고 아이씨유 하고 계실 것 같았다.
프라이버시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동영상 감상은 꿈도 못 꿀 자리였다.

할 것도 없는데 잠도 안 왔다.
오랜만에 만나 화기애애하게 젖은 분위기에 취했던 건지 난 여동생과 동생 방에서 이야기를 했다.
여동생은 귀신 이야기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귀를 막고 간질 환자처럼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무서워했다.
그 반응이 재밌었다.
난 착신아리와 링과 그루지 등 내가 알고 있는 모든 호러물들을 짬뽕시켜서 귀신이야기를 했다.
하지마라고 오만상 찡그린 여동생이 말했다.
녀석이 몇 번 계속 경고했지만 흥에 겨운 나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그 때 잠깐 잊고 있었다.
이년이 생긴 건 트리스타나인데 하는 건 알리스타라는 사실을...

나는 복부에 클린히트 스트레이트를 쳐맞고 나서야 이야기를 멈췄다.
여동생은 무서워서 혼자서 못자겠다고 글썽거렸다.
자기 침대 아래서 이불 깔고 자라고 나한테 부탁했다.
내겐 부탁이 아니라 협박처럼 들렸다.
난 소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땅바닥은 더럽게 불편했다.
이따위 장소에서 숙면이란 타릭으로 바론 잡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였다.
난 여동생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거실로 나갔다.

푹신푹신한 소파에서 두어시간쯤 곯아 떨어졌을 때였다.
명치에 강력한 충격이 느껴졌다.
곤히 자다가 요단강 건너갈 뻔한 충격이었다.
억소리를 내며 일어나자마자 동생이 울면서 날 죽어라 팼다.

'내가. 귀신. 무섭다. 했지. 아래서 잔다 해놓고. 어딜 가버려. 가위 눌렸잖. 눌렸잖아. 귀신이야기. 하지 말랬지!'

동생은 북 대신 내 몸을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후드려패면서 울먹거렸다.
진심으로 귀신보다 이년이 더 무서웠다.

그 날 기절했던 건지 잤던 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눈을 다시 뜨니 아침이었다.
온 몸이 아팠다.
여동생은 소파 밑에 이불을 둘둘 말고 자고 있었다.
부시럭거리면서 일어난 여동생은 태연하게 말했다.

'잘 잤어?'

사이코패스같은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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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험생이 된 후 첫 외출이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탄 나는 창 밖을 보면서 이번 외출 때는 무슨 게임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룸메이트가 문명을 하도 추천했는지라 어떤 게임인지 잠깐만 해 볼 생각이었다.
시간여행 수준의 상대성 문명이론을 아직 경험하지 않았을 때였다.

창 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절묘하게 갈비뼈 사이를 파고드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가볍게 콕콕 찌르는 수준이 아니라 꾸우욱 혈자리를 짚어 쑤셔대는 게 지건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비명이 절로 나왔다.
멀록이나 낼 법한 비명을 지른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나와 같은 학교 교복을 입은 여동생이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여동생은 나와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하는 짓만 보자면 아마존의 기상을 물려받은 전투종족인 주제에 동생년은 머리까지 좋았다.
여동생은 만만치 않은 입학 성적제한을 가뿐히 통과하고는 별 거 아니었다는 듯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전화로 직접 들은 나는 여동생과 통화중이었단 걸 잊은 채 무심결에 재수없는 년이라 중얼거렸다.
난 전화 케이블로도 살기가 전해진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어쨌건 외출주말에 여동생과 나는 같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나를 보던 여동생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외출한다고 넋 빠져 있는 것 좀 보소.
누가 보면 쟤가 선배인 줄 알았을 거다.

부모님과 핫라인으로 연결된 사우론의 눈이 학교에 심어진 이후,
난 룸메이트들과 곧잘 하곤 했던 프리즌 브레이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모르도르로 만들고 내 학창생활의 유일한 낙인 기숙사 탈출을 봉쇄해 버린 원흉을 바라보고 있자니
불현듯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문짝브레이킹 사건 이후 내게 자유로운 감정표현의 권리란 국회의원 선거공약마냥 헛된 신기루에 불과했다.
나는 소심하게 답했다.

"왜?"

여동생이 말했다.
곧 부모님 결혼기념일이니 선물 사러 같이 나가자는 거였다.
결혼기념일은 어버이날이었다.
그리고 여동생의 생일은 어버이날 일주일 전이었다.
난 여동생이 한 말에서 자기 생일 선물도 사내라는 숨겨진 뜻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내 문명과 함께하는 1.2초는 날아갔다.

그때들어 여동생은 내게 아무런 폭행을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에 대한 두려움이 인류의 DNA에 새겨져 있듯 여동생에 대한 공포는 내 전두엽에 각인되어 있었다.
나는 생명보험비 내는 셈 치고 여동생에게 신발을 생일선물로 사 줬다.
신발을 신고 저 멀리 꺼지라는 행간의 의미가 내포된 선물이었다.

선물을 모두 사고도 시간이 널널하게 남았다.
여동생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머릿속에선 문명문명하고 있었지만 나는 오랜만에 나온 외출이니 즐기자는 생각에 그러자고 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자투리 시간이 남았다.
영화관 한 쪽 게임장엔 펀치머신이 있었다.
여동생은 나와 펀치머신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 눈빛이 Be폭력주의자인 간디의 눈빛을 닮았다.
순순히 돈을 집어넣는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벼룩의 간을 빼먹을 년.

나는 지갑을 꺼냈다.

펀치머신은 역대 최고점수 870점 당일 최고점수 810점 짜리였다.
나는 천원을 집어넣었다.
두 번 칠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쳤다.

600점대였다.

나는 동생에게 눈짓으로 차례를 넘겼다.
여동생은 단단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 보니 나랑 싸울 때 저년이 제대로 자세잡고 날 때린 적은 없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 여동생은 한줄기 바람이 되었다.
공기가 찢어지는 굉음이 울려퍼졌다.
소닉붐이 이런 건가 싶었다.
갑자기 들린 폭음에 게임장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 쪽을 쳐다봤다.
난 멍하니 점수판을 바라봤다.

850점.

빵파레가 울리고 신기록 이벤트로 타격대가 다시 올라왔다.
사실 그런 이벤트가 있다는 것도 나는 그 때 처음 알았지만 여동생은 당연하다는 듯 연이어서 펀치를 날렸다.
여동생의 원투콤보를 보며 나는 중학교 시절 여동생에게 개기지 않기로 결심한 건

내 인생 최고로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그 날 영화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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