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너무 화려한 사람은 좀 부담스러운 것 같아. 난 그냥 수수하고 평범한 스타일이 좋아. 예를들면 수지같은?"
느닷없이 던져진 그의 말에 우리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를 향해 조소를 날리지도, 격분하지도, 혹시 그가 법으로 금지된 약물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가 아닌지 동공이나 신체징후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저 가만히 앉아 술잔을 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잔을 들어 넘치지 않을 정도로 부딪친 후 천천히 하지만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잔안의 술을 모조리 입으로 털어넣었다.
마치 그 순간만을 위해 수천번, 수만번은 연습한 것 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씁쓸한 술이 목젖을 찌르르 울리고 풍겨올라오는 알콜냄새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몇 번이나 기계적으로 같은 동작을 반복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래. 나도 이번에 차를 바꿀까 봐. 우리같은 서민들이 타기엔 페라리가 제격이겠지?"
"확실히 아침식사는 속이 거북해서 많이 먹긴 힘들더라구. 그래서 이제부턴 12첩 정도로만 먹기로 했어."
"이번 회사 워크샵은 화성으로 가기로 했어. 새로 생긴 우주정거장 우동 맛이 괜찮다고 하더라고."
우리의 빈정거림에도 그는 떠벌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 정도 여성이라면 자신도 어느정도 양보하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준비가
되어있다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미쳤다.'
애석하지만 사실이었다.
두어번, 강산이 바뀔정도의 시간동안 곁에서 그를 지켜보면서 우리가 내린 결론이었다.
얄팍한 우정으로 덮어버리기엔 너무나도 확고하고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유년기의 그는 별처럼 빛나던 소년이었다. 그는 총명했으며,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맑은 눈을 가졌고, 비 온 뒤 개인 하늘처럼 맑고
투명한 영혼을 가진 소년이었다.
하지만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맑았던 눈은 흐려졌고, 투명했던 영혼은 더럽혀지고 혼탁해졌다.
신은 가혹했다. 그건 너무나도 이른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변질되는 시기와 맞물려 그의 신장도 더이상 자라지 않게 되었다.
그건 일천구백구십년대의 일이었다. 짧게 보면 십여년 길게 보면 한세기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나의 뇌리엔 그 때의 그 일이 깊게 새겨져있다.
그의 변화는 우연히 집안의 오래된 책장에서 발견하지 말았어야 할 금단의 도서를 발견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 우리는 그를 막지 못했다. 그 책의 첫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진 살색의 향연은 그의 내면에 작은 일렁임을 안겨주었다.
잔잔한 호숫가에 울린 파문은, 이내 거친 파도가 되어 그를 덮쳤고 그는 그 파도에 속절없이 휩쓸려 가고 말았다.
소년에겐 아직 허락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헤어나오기에 이미 그는 너무 깊게 빠져들어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우리는 그를 그냥 방치해버렸다. 도리어 그의 키가 자라지 않는 것과 결부시켜 그를 조롱하고 비난했다.
"매일 집에서 ㅁㅁㅁ만 치니까 키가 안크지."
우린 어렸고, 어리석었다.
뒤늦게야 그의 변화를 눈치챘지만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이미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자라기 시작하는 시기였지만 남들보다 키가 작다는 이유로 아직 여탕에 갈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이 가엾은 영혼이 결국 미쳐버렸구나.
우리들 중 키는 가장 작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앉은키는 가장 컸던.
그래서 얼핏 봐서는 서있는 지 앉아있는 지 구분이 잘 가지않아 슈뢰딩거의 인간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던.
항상 자신은 다리가 짧은게 아니라 허리가 긴거라며 절규하던 그 가엾은 영혼은 이제 완전히 미쳐버렸구나 라고.
어느덧 우리는 소년에서 청년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은 멈출줄을 몰랐고 우리는 그런 그를 존중하기로 했다.
그는 정복자가 되길 원했다. 비록 키는 작지만 앉은키는 누구보다 크다며 나폴레옹과 같은 정복자가 되기를 원했다.
물론 그 대상은 여성이었다.
우리는 그런 그를 보며 그도 나폴레옹처럼 외딴 섬에 유배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재.
그는 여전히 발정기였다.
항상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자신을 꾸미고 다니면서 자신의 페로몬을 사방에 분출하고 다니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대부분 결말은 항상 꼬리내린 강아지 꼴이였지만 그는 도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이를 먹고 그의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지만 대신 눈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갔고 더불어 간수치 또한 높아져만 갔다.
그는 여전히 꿈과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수지? 난 그렇게 이쁜지 모르겠던데?"
마치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와 같은 여성을 만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지만 그가 꾸는 꿈이 저런 꿈이라면 그를 영원히 림보에 가둬두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그를 현실로 데리고 와야만 했다.
"설사 수지가 좋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반대할 걸.."
"누가?"
"JYP..."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가 나지막이 되뇌였다.
그 날 이후, 그는 다시 한 번 여성과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그가 보여준 사진 속 여성은 한떨기 찔레꽃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런 여성을 비록 벗이지만 이토록 추악한 인간의 손에 놀아나게 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만이 우리가 그 여성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다.
그리고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만남이 있기로 했던 날, 그는 지독한 고열에 시달렸다. 목이 퉁퉁 부어오르고 사지를 제대로 가누지 못 할 정도로 심한 감기에 걸렸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오늘이 자신에게 마지막 날이라 할지라도, 저 광활한 대지위에 썩은 고목처럼 자신의 몸을 뉘이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물러서거나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예전에 봤던 TV프로그램을 떠올렸다.
수컷 사마귀는 번식기가 되면 조심스럽게 암컷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교미가 끝난 후 암컷에게 잡아먹혀 최후를 맞이한다.
어린 시절 나에겐 꽤 큰 충격이었다. 그 때의 머리를 얻어맞는 듯 한 충격을 나는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짝짓기를 위해 목숨을 거는 생명체가 바로 내 두 눈 앞에 서 있었다.
수컷 사마귀가 다시 한 번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는 단순한 변태, 색정광이 아닌 진정한 남자였고, 사나이였다.
그 날따라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우리는 자주 가던 술집의 익숙한 테이블에 앉아 그가 돌아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가 돌아온 건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는 웃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운명을 달리할 거 같던 낯빛도 어느새 많이 좋아져있었다.
자리에 앉은 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고 우리는 말이 없었다. 우리는 말 없이 빈 술잔에 술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평소처럼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린 식사를 했어. 그리고 영화를 봤지.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어. 정말 환상적인 시간이었지.
하지만, 그녀는 내 짝이 아닌거 같더라고. 그래서 그냥 그녀를 보내줬지.
거짓말, 그것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의 눈은 이미 충혈되어 있었다.
아직 첫 술잔을 들이키기도 전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미 젖어 있었다.
머지.........?